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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 <하악하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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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악하악
 
이외수
해냄

하악하악’ 이라니 거참 민망한 제목이다. 내게는 도무지 ㅂㅌ 들의 거친 숨소리로밖에 보이지 않는 ‘하악하악’. 게다가 그 위에 적힌 문구가 더 걸작으로 ‘이외수의 생존법’ 이란다. 표제를 읽는 것만으로도 어찌나 웃음이 나던지. 제목만 독특한 ‘이 웬수’ 같은 책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첫 장을 넘겨본다.

‘마음대로 돈을 그려서 쓸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제일 먼저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작가의 물음. 나는 별 생각할 시간도 없이 속으로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종이를 가져다가 돈을 그리겠소.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 질문 하나가 책을 읽는 중간중간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러면 그때마다 돈을 그린 후의 내 행동을 차근차근 상상해보게 되는 것이다.

‘먼저는 돈을 그리겠지. 그것도 동그라미를 여러 개 쳐가면서. 일단은 이 돈을 쓰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시험해보기 위해 적은 액수의 돈을 그려서 빵 하나 정도를 사먹겠어. 이게 되는구나 싶으면 그때 좀 더 큰 액수를 들고 값나가는 물건을 사러 갈 거야. 내 월급으로는 욕심내기 힘들었던 명품 가방을 하나 사러 간다고 상상해볼까? 가방을 사고도 거스름돈까지 받을 수 있도록 넉넉히 숫자를 적은 돈을 꺼내 들겠지. 자랑스럽게 돈을 쓱 꺼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연필로 휘갈긴 숫자 몇 개에 좋다고 달려온 내 꼴이라니. 왠지 내 모습이 그 종잇장보다도 값어치가 없는 졸부처럼 느껴져서 손에 든 돈을 박박 찢어 버렸지. 그리고는 다시 돈을 그리는 거야. 이번에는 조금 더 깨끗한 종이에 또박또박 숫자를 써서. 재차 물건을 사러 찾아가서 돈을 꺼내 들겠지만 그때마다 물건을 교환하지는 못하고 돌아와 좀 더 ‘값어치 나가게’ 돈을 그릴 것 같아. 적어도 그 돈을 내미는 내 손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걸작’이 되도록 돈을 그리겠어. 그 돈이 숫자가 적힌 종이가 아닌 그 자체로서 내 노력이 가득 담긴 그 무엇이 되었다고 느껴질 때에야 비로소 물건과 교환을 할 것이야. 그리고 생각하겠지. 내가 바라는 것은 단순히 갖고 싶은 물건을 갖는 것이 아닌, 노력하고 힘들여 성취하는 보람이었다는 것을.’

플레이톡에서 네티즌들의 호응이 좋은 글을 모았다더니 과연 촌철살인 할 글들이다. 사실 독자의 깊은 생각을 이끌어내는 데에 반드시 긴 문장과 설명이 필요한건 아니잖아? 작가의 삶에 대한 고민과 관찰이 응축된 힘 있는 한 마디가 독자에게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고를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악하악’. 피드백이 빠르고 오래 집중하지 못하며 순간순간의 변화에 익숙한 네티즌을 위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짧은 글귀들이 담긴지라 책장을 생각 없이 홀라당 넘겨버리는 독자들을 배려한 것일까? 잠깐 보고 넘기기 아까운 물고기 그림들이 한 문장 한 문장을 음미할 시간까지 벌어주니 참 친절한 책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모 프로그램에서 ‘새가 바라보는 방향’, ‘물고기가 헤엄치는 방향’으로 작가가 살고 있는 감성마을 표지판을 만들었다는 그의 말이 떠오른다. 화살표와 숫자에는 익숙하지만 새가 어떻게 생겼는지, 물고기가 머리 쪽으로 헤엄치는지 꼬리 쪽으로 헤엄치는지 모르는 불쌍한 이가 있다면 찾아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가졌지만 생각할 시간은 적은 바쁜 현대인. 잊고 있던 감성을 가볍게 터치해주는 이외수 만의 기발한 문장과 함께 오늘 하루 한 귀퉁이에 따뜻한 여백을 가져보시라.

이외수의 플레이톡 : http://playtalk.net/oisoo/